구글과 아마존이 4차 산업혁명 시대를 견인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배경에서 중소기업은 숨은 공신으로 꼽힌다. 구글과 아마존은 자율주행과 음성인식 등의 대표 기술을 쌓고 시장을 선점하는 과정에서 부족한 부분은 원천기술을 보유한 중소기업과 인수·합병(M&A) 하거나 그들의 고급 인공지능(AI) 개발인력을 충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바꿔 말하면 이들 기업은 서비스 생태계를 확장하기 위해 중소기업과 소통하며 합심했고, 결국 4차 산업혁명을 이끄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몇 해 전 있던 일이다. 국내 AI 음성인식 기술경쟁력 제고를 두고 이동통신 3사와 미래창조과학부(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실·국장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당시 자리에선 구글과 아마존의 성장 배경을 공유하면서 국내 기업들이 나아갈 방향을 두고 브레인스토밍(brainstorming)이 이어졌다. 원천기술을 보유한 중소기업과의 협업과 상생이 중요하다는 의견이 테이블에 올랐다.
하지만 이통사 관계자는 “중소기업과의 협업이 중요해 관련 중소기업을 발굴하려고 고개를 돌렸지만, 살아남은 중소기업은 없었다”고 밝혔고, 미래부 고위 임원은 “왜 처음부터 중소기업과의 상생을 생각하지 않았냐”는 질타가 뒤따랐다.
국내 한 AI 전문가는 이에 대해 “AI는 사용자가 많을수록 발전하기 때문에 생태계 확장이 중요하지만, 국내 이통사들은 폐쇄적이기 때문에 발전이 더딜 수밖에 없다”며 “지금부터라도 기술공유를 꺼려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대기업의 기술경쟁은 관련 기술을 보유한 중소기업과의 소통과 협력에 따라 결과를 달리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진다.
일본의 경제침략으로 나라가 힘을 모으고 있는 현재 이 같은 우려가 다시 새나온다. 최근 국내 한 매체는 반도체 공정에 쓰이는 ‘초고순도 불화수소’를 만드는 기술이 국내 중소기업에서 이미 8년 전에 개발됐지만, 빛을 보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기술 개발에 성공해도 판로가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거액을 들여 생산시설을 구축할 수 없었다는 게 이유로 떠올랐다. 초고순도 불화수소는 불순물 비중을 100억분의 1 이상 줄이는 게 핵심기술이다.
이 매체에 따르면 해당 중소기업이 개발한 기술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에서 수입하는 일본산 불화수소와 대등한 품질을 확보할 수 있다.
특허청이 지난 2013년 특허를 부여한 이 기술은 불화수소 속 불순물 비중을 최소 10억분의 1 이상, 최대 100억분의 1 이하까지 내릴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기술은 사장됐다.
초고순도 불화수소를 생산·판매하려면 공장을 짓는 것은 물론, 고가의 분석 장비 등을 갖춰야 하고, 이송 과정에서 오염을 막는 특수용기를 필요로 하는 등 초기 투자비용이 만만치 않다.
게다가 초고순도 불화수소가 필요한 기업이라도 반도체 공정과의 적합여부를 시험하기 위해선 최소 6개월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당장 가져다 사용할 수도 없다.
대기업이 많은 돈을 투자해도 결과가 좋지 않으면 뒤따를 후폭풍은 커지는 셈이다.
그렇다고 정부가 나서 시설투자 예산을 지원하기도 쉽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각에선 이러한 이유로 사장된 기술은 적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대기업이 중소기업과의 상생을 등한시해 일본의 경제침략을 불러일으켰다는 지적도 나온다. 산업 생태계에서 상생구조가 허술하면 경쟁력을 잃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는 교훈도 건질 수 있다.
지금부터라도 대기업의 시계에는 중소기업과의 소통과 기술 협업의 시간이 필요하다. 기술을 빼앗고 짓눌러 덩치만 키우는 기업이 아닌, 생태계를 확장하는 파트너라는 사고도 가져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