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칼럼] 시작이 반이다
[금요칼럼] 시작이 반이다
  • 신아일보
  • 승인 2024.05.10 05: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먹글씨연구소 황성일 대표

‘인사동시대’를 연 신아일보가 창간 20주년(2023년)을 시작으로 ‘문화+산업’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칼럼을 기획했습니다. 매일 접하는 정치‧경제 이슈 주제에서 탈피, ‘문화콘텐츠’와 ‘경제산업’의 융합을 통한 유익하고도 혁신적인 칼럼 필진으로 구성했습니다.
필진들은 △전통과 현대문화 산업융합 △K-문화와 패션 산업융합 △복합전시와 경제 산업융합 △노무와 고용 산업융합 등을 주제로 매주 둘째, 셋째 금요일 인사동에 등단합니다. 이외 △취업혁신 △서민기업이란 관심 주제로 양념이 버무려질 예정입니다.
한주가 마무리 되는 금요일, 인사동을 걸으며 ‘문화와 산책하는’ 느낌으로 신아일보 ‘금요칼럼’를 만나보겠습니다./ <편집자 주>

 

 

어려서부터 어지간히 들었던 말이 있다. '시작이 반이다.' 정말 시작이 반일까? 사전에선 '무슨 일이든 시작이 어렵지 일단 시작하기만 하면 일을 끝마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그런가? 

이 작은 문장 하나를 화두 삼아 고민하다 나름 결론을 냈다. 무언가를 시작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절반을 이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그간의 행동 패턴과는 다른 새로운 행동이 나의 삶에 들어오기까지는 내 마음속 보수진영을 설득하는 작업이 필요한데 그 비중이 적지 않아서 비롯된 말은 아닌가 싶다. 심히 나쁜 행동이나 극히 위험한 시도가 아님에도 우리의 몸은, 나의 생각은 새로운 시작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자문자답을 거듭하고 당위성을 설명하며 스스로를 합리화해야만 한다. 그래서 시작이 어렵다. 정지돼 있는 자동차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려면 지면과 타이어 사이의 마찰력을 넘어선 구동력이 필요한 것과 같은 이치다.

컴퓨터 활자를 이용하기 전 예전 인쇄소에서는 이미 만들어진 글자(활자, 活字)를 집자(集字)했다. 그렇게 하면 언제나 동일한 형태와 품질의 글자가 인쇄됐다. 이때는 집자의 오류를 줄이는 것이 가장 큰 일이었다. 하지만 글씨를 쓰는 사람으로서는 2000자, 3000자 되는 긴 글을 붓으로 옮기는 작업의 시작엔 두려움이 함께 하게 된다. 같은 글씨체로 일관된 느낌을 유지하며 마지막 글자까지 실수 없이 잘 써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그 두려움이 조금씩 작아지는 것을 느끼게 됐다. 큰 부담과 함께 탄생한 첫 글자가 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멀쩡한 작품지를 연습지로 전락시켜 버리는 그간의 행동을 바꾸면서부터다. 첫 글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냥 써 내려간다. 첫 글자의 부족함은 다음 글자가 채워주고 첫 줄의 모자람은 다음 줄이 보완해주며 첫 번째 단락의 어색함이 다음 단락으로 인해 완성돼 간다. 작은 글씨들이 모여 집채만 한 고래가 만들어지는 느낌이다. 하루하루가 모여 1년이 되고 10년이 되고 그것이 일생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시작을 해야 고칠 수 있고 채우면서 완성해 갈 수 있다.

첫 글자. 그것은 역사의 시작이다. 작품 전반에 걸쳐 나타나게 될 DNA를 품은 글씨의 시조(始祖)가 되기 때문이다. 첫 글자의 초성이 ㅅ(시옷)이라면, 이것은 이후에 나올 'ㅈ'과 'ㅊ'의 근본이 될 것이고 굵기나 각도 또한 다음에 나올 글자에 심대한 영향을 줄 것이 분명하니 첫 글자의 중요함은 불문가지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러한 중압감에 겁먹지 않는 것, 그 시작에 주저함이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전문가요. 프로다.

한 번 가 본 길은 쉽다. 처음이 어렵고 시작이 어렵다. 시작을 하는 순간 이미 시작은 시작돼 그 시작은 사라진다. 그럼에도 시시각각으로 새로운 시작이 계속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주의(ism)가 나올 때마다 반복됐던 미술사를 우리는 기억한다. 1872년 기존의 아카데미 화법에서 크게 벗어난 클로드 모네의 '인상,해돋이' 작품에 내려진 비평가 루이 르로이의 '미완성인 벽지무늬보다 못한 완성도'라는 혹평도 시대의 변화와 새로운 시작 앞에 사라져갔다. 최초 부정적인 의미로 탄생했던 인상주의는 오늘날 세계인의 많은 사랑을 받는 선구적 예술가들로 인해 존재를 확실히 하고 있으며 20세기 중반 추상표현주의의 주관적 엄숙성을 반대하면서 탄생한 팝아트는 매스 미디어와 광고 등 대중문화의 시각 이미지를 미술의 영역 속에 끌고 들어왔다. 기존의 관습이나 규범을 깨는 시작은 늘 비판을 감수하는 용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변화는 시작에 있고 그 시작은 용기 있는 자의 몫이다.

/황성일 먹글씨연구소 대표

※ 외부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master@shina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