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암행어사 출두
[기고] 암행어사 출두
  • 신아일보
  • 승인 2024.11.28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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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탄스님·동국대 출강
 

세간사(世間事)가 녹녹하거나 편치만은 않다. 그저 암울하다는 표현이 적합할듯. 세계도처에서 전쟁의 참화(慘禍)와 내전(內戰)으로 죄없는 인명이 살상되어지고 있다. 먼나라만의 이야기는 결코아니다. 국내정세 또한 매우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음이다. 물가는 나날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저성장, 장기불황, 청년실업문제, 저출산과 인구고령화로 지방소멸등 온통 버거운난제를 떠안고 있으며 거대한 격랑에 휩쓸린채 절대절명의 위기에처한 대한민국호는 망망대해를 속수무책으로 표류하는 듯하니, 절박한 시절이 아닐 수 없다.

여야는 우와 좌로 나뉘어 극심한 대립과 정쟁으로 국론은 분열되었고 쉼없이 당리당략(黨利黨略)으로 제살길 찾기에만 급급하여 도탄에 빠진 민초들의 시름은 아랑곳하지 않고있다. 꼭 혼군의 대명사격인 인조, 선조, 고종의 그시대의 상황처럼 표리부동(表裏不同)하고 주변 외세들의 침탈위기와 국운은 바람앞에 등불처럼 꺼질듯이 위태롭게 일렁이고 있다. 이러한때 민초들은 간절히 꿈꾸고 있는바, 암담하고 고단한 현실에서의 돌파구를 찾아주고 탐관오리들을 과감하게 척결해줄 암행어사의 출두를 간곡히 염원해본다. 

암행어사의 임용은 촉망받는 공직자에게는 큰 영예가 아닐수 없다. 임금의 엄중한 명령을 받아 비밀 업무를 맡는 일도 쉽지는 않거니와, 백성들의 억울한 민원을 구중궁궐의 임금께 전달하는 중요한 임무였기에 더욱 엄격히 공명한 마음가짐으로 임해야했다. 공무는 제쳐두고 계집질에만 여념이 없던 변학도라는 탐관오리를 응징한 이몽룡이 지리산자락 남원땅에 다달아 걸인복장으로 변복을 하고 동서남북의 성문을 걸어 잠그고는'암행어사 출두야~'를 외친후 동원의 대청 마루에 의젓하게 좌정한후 못된 탐관오리를 징치하여 벌한 후 백성들의 민원을 해결해준 판소리의 한대목처럼 오늘 민초들의 편에선 암행어사의 등장을 민중은 그토록 갈구하고있다. 

역사속에서 전해지는 대표적인 암행어사하면 박문수(1691~1756)이다. 박문수 구전설화는 무려 백여건이나 된다고 한다. 불합리한 사회구조와 부조리에 짓눌려도 말 한마디 감히 내지 못했던 민초들의 정의로움에 대한 열망과 비원은 그를 통해 느낄 수 있다. 어사 박문수는 고령박씨로 박정희 대통령(1917~1979)의 선조이기도 했다. 1727년 영조의 명을 받아 영남지방에 어사로 파견된다. 이때 탐관오리를 적발하고 문책하여 추상같이 엄하게 다스렸다. 환곡(춘궁기에 빌려줬다 추수 뒤 회수하던 국가 비축 곡물)을 풀어 굶주리고 헐벗은 백성에게 나눠주는가 하면 사재를 털기도 했다. 그러나 실상은 박문수는 어사였던 적은 있어도  ‘암행어사였던 적이 없다. 그런데도 ‘암행어사=박문수’라는 등식이 오랜 세월 다져진 이유는 뭘까. 박문수는 소수파인 소론에 소속된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으며 여러모로 정치적 입지가 좁을 수밖에 없었다. 대신 남다른 재능이 있었으니, 현장에서 배우고, 현장에서 답을 찾는'실천적 리더십'이 그것이다. 이를 잘 활용한 그는 수많은 이들에게 영웅이 되고, 전설이 됐다. 천안땅 은석산에 묻힌 박문수는 암행어사 설화 주인공으로 통하지만 실제 어사 경력에 대해선 혼선을 빚고 있다. 최근 승정원일기, 연보(年譜) 등을 통해 역사상 박문수의 어사 이력과 참모습을 밝힌 논문이 나와 주목을 끌고 있다. 박문수는 '별건어사'파견 직후인 1728년 3월 이인좌의 난 을 진압한 큰 공을 세워, 당상관(堂上官) 인 영남관찰사로 파격적인 승진을 했다. 이후 어사 박문수의 지방 파견은 당하관 어사와는 성격이 다른 고위직 업무의 수행이었다. 일례로 1731년 비변사 구관당상으로 영남 재해 진휼 감독한 것을 일반어사 의 역할로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왕명(王命)으로 보내진 사자였지만 사명을 위해 자신을 숨겨야 했던 암행어사에 대한 지방관리나 토호들의 반격이 심했으며 삼대가 죽임을 당하는 모함도 빈번하게 있어왔다. (이기환의'흔적의 역사에서') 

실제로 어사가 공적인 일을 하다가 물리적인 보복을 당하거나, 훗날 정치적인 보복을 입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정의로움을 세우는 일이 정계의 유력한 인사들에 의한 물타기와 보복에 시달리는 것은 현재 오늘 한국사회가 겪고있는 갈등의 한 요소이기도하다. 

예전의 양반들은 자신의 집안내력을 달달외우고도 또 그것도 모자라 손수 선조의 행적을 필사하여 지니고 다녔는데 소맷자락에 넣고 다니던 손바닥 보다 작은 족보를 '수진본'이라고 한다. 이제는 몇점 남아 있지도 않은 남의 집안의 내력이 궁금해 종묘의 헌책방과 전국의 고서점을 뒤지고 계보사와 족보공부를 하다보니 권력과 명예와 부를 향한 인간의 명리와 영화가 정말 덧없음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살아 생전에는 명리를 쫒지 않을 수 없는 사회구조와 맞닥뜨리게 되고,  한 시대를 살아가며 산촌에서 빈한히 궁핍하게 사는것보다 최고존엄인 권력자와도 친교를 맺고 하다못해 지역사회의 수령과만 친해도 고을의 인사청탁이 난무하고 브로커들의 뇌물공세가 산더미처럼 쌓여들기 마련이다. 

 

어떠한 와중에, 《고령박씨 초고본족보(맨 처음 족보를 제작하기전 준비를 위한 원고)》를 우연히 손에 쥐고 보니 민족중흥의 기치를 들고 보릿고개를 사라지게한 박정희대통령께서도 살아생전에 찾아 헤메을지도 모를 고령박씨 집안의 미완성 족보가 내 수중에 들어오게 된 인연이 있었다. 이후에 또 어찌된 인연에서인지 오마패(말 다섯마리가 청동에 새겨진패)를 옥션을 통해 구입했다. 가끔 이런 귀물을 들여다 보다가 삶이란 꼭 정리정돈 되어져야한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것이다. 이제까지 쌓아놓은 모든 잡동사니를 정리해야만 하겠는데... 애지중지하던 책이며 전적, 그토록 물건탐을 못버려서는 산더미처럼 모여진 단행본이며 고물건들속에서 내 공간을 축소해 놓고 사는 꼴이라니, 그동안 소장한 잡동사니가 꽤된다. 내가 도대체 이런 물건을 구입해 쌓아 놓아야했을까? 하는 자괴감이 몹시들어 우울감을 느낄 정도이다. 옥션에서 구한 암행어사 마패, 삼한갑족성씨들의 희귀본족보며 고려청자, 조선백자, 도자기류와 골동을 사기위해 몇날 며칠 주머니를 털어 경매나 옥션에서 시간을 보내었고, 그덕분으로 여러 다양한 공부도 했으며 비록 비정규직 대학 교원도 지내고 많은 사람을 만나기도 했지만, 차라리 그돈을 지니고 있었다면 해외여행이나 실컨하고 잡념없이 한시름 걱정을덜고 살았을 것인데, 후회막급한 일이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물건을 들여다보며 가끔은 시름을 잊기도한다. 평범한 우리 주위의 소시민은 적은 것에 만족하며 잘들 살아가고 있지를 않은가. 

이 몸은 일생을 한량처럼 살아서 그러한가 재물의 가치보다는 이상을 쫒고 살아왔지만 지금에와 뼈저린 후회를한다. 내 처지에서 재물을 모은다는것은 비록 세태에 찌든 잡놈이 되어야 할 짓이었지만, 늙고 병들었을때 병원에 입원하고 치료하고 약사먹어야 할 푼돈이 호주머니에 있느냐?, 없느냐?, 이건 대단히 중요한 인생고의 문제인듯하다. 이런 불우한 현실을 마주할 줄 미리 예견이라도하였다면, 청춘의 한때 재테크도 좀 하고 저축도하여 은행 잔고를 넉넉히 해 놓았을껄. 그러나 짧은 인생살이에서 가장 큰 깨달음이란 이 지상의 모든것이 결국은'헛되고 헛되다'는 것이다. 한시적 권력에 도취되어 기고만장한 자여!  "망나니의 칼날에 목이 떨어져 나갈 때 그 회한의 눈물이나 흘리며 후회하지 말지어다." 

정치가 만든 지옥에서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하는 부류의 사람들 그네들의 비루한 삶을 위안하는 국가시스템속에 감찰 기능은 '니편 내편'에게 공명정대해야 하건만, 오늘 현생에서의 절대권력은'내편에겐 한없이 관대하고 니편에겐 더없이 무겁다'이러할지언정 그 힘을 부여해준 민생들의 지지와 동조를 잃게되는 날 멀지않은 미명에 도래할것이고, 어떤하루 권력에서 무장해제되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져버린다는 혹독한 지난 역사적 교훈을 잃지나 말것을 진정으로 권고한다. 600년을 이어 온 조선이란 나라가 결국엔 저물어 소멸했듯, 우리의 시대도 또한 언젠가 소멸하여 역사책에서 배우게 될 것이다. 이시대의 어려운 국면과 그 장애물을 해소할 골든타임이 점점 사라져가는 시점에서 이몸  오지의 변방을 자유분방하게 마음껏 여행하고있다. 그러하니 나의 사색의 깊이는 이른새벽 이슬머금은 풀잎처럼 파롯파롯 더욱 물이 오르고 있다는 거다. 바로 내 인생의 봄날이 아직 다 지났다고 하기에는 미련이 좀 더 남아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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