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11위이자 50여개 이상의 계열사를 보유한 유통대기업 신세계그룹이 지난 9월 정기임원인사를 깜짝 발표한 지 50여일이 됐다. 예상보다 꽤 빨리, 그리고 인사의 폭도 무척 컸다. 계열사 수장 9명이 옷을 벗었다. 전체 대표이사의 40%가 떠난 셈이다. 한 명의 CEO(최고경영자)가 많게는 3개사 경영을 책임지는 ‘통합대표체제’도 눈에 띄었다. 조직을 완전히 뒤흔들었다. 신세계그룹은 임원인사를 통해 “회사 경쟁력 전반을 재정비하고 기존 틀을 깨는 새로운 조직 운영체계를 도입했다”며 “그룹의 미래 준비를 더욱 강화하겠다”고 강조했다.
최근에는 정용진 그룹 부회장이 구단주로 있는 SSG랜더스의 김원형 감독이 경질됐다. 김 감독에겐 올해가 재계약 3년의 첫 해였다. 김 감독은 작년 프로야구 통합 우승과 올 가을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성과를 올렸음에도 운영 변화, 혁신을 명분 삼아 교체됐다. ‘쇼크’ 수준의 임원인사와 한국시리즈 우승 감독의 경질, 신세계그룹의 절박함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그룹 경영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정용진 부회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위기의식의 중요성을 수차례 강조했다. 어려운 경영환경이지만 위험을 직시하고 기본과 본질에 충실하면서 고객의 광적인 집중을 주문했다. 하지만 지금 신세계는 어떤가. 올 들어 실적만 봐도 우울하다. 간판 이마트의 경우 상반기에 400억원에 가까운 적자를 냈다. 또 2분기 매출은 ‘로켓배송’ 쿠팡한테 뒤졌다. 공교롭게도 쿠팡은 올 들어 만성적자의 그림자를 지우고 흑자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유통 강자였던 이마트는 몇 년 전만 해도 쿠팡을 한 수 아래로 봤다. 지금의 유통 판도는 달라졌다. 신세계그룹도 나름의 노력을 해왔다.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무게 추가 옮겨진 유통시장 변화에 대응하고자 쓱닷컴을 키우고 지마켓을 인수했다. 최근에는 충성고객을 최대한 확보하고자 온·오프라인 혜택을 하나로 모은 유료 멤버십 ‘신세계 유니버스 클럽’을 선보였다. 그렇지만 쓱닷컴의 존재감은 여전히 쿠팡, 네이버쇼핑만 못한다. 수익성이 좋았던 지마켓은 이마트에 인수된 이후 적자가 지속됐다. 쓱닷컴과 지마켓의 작년 적자 총액만 1800억원에 육박한다. 국내 1100여만명의 회원을 둔 쿠팡의 유료 멤버십 로켓와우에 맞서 야심차게 내놓은 신세계 유니버스 클럽은 론칭 반년이 다 되어가지만 기대에 못 미치는 수준이다.
이런 이유들 때문인지 정용진 부회장 최측근인 강희석 전 이마트·SSG닷컴 대표도, 정유경 총괄사장 신임을 얻어왔던 손영식 신세계 대표도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를 두고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 입김이 컸다는 얘기도 들렸다. 정용진·정유경 남매경영의 위기로 볼 수 있다.
신세계그룹 인사 발표 50여일 지난 지금 조직원들은 당시의 충격을 조금씩 덮어가며 내년 사업 방향과 전략을 준비하는 모습이다. 신세계발(發) 인사 쇼크가 조만간 단행될 롯데, CJ 등 다른 유통대기업으로 번질 가능성은 충분하다. 롯데와 CJ도 경영 사정이 신세계와 비슷하다.
올 들어 경영계에서 가장 많이 회자됐던 말 중 하나는 ‘해현경장(解弦更張)’이 아닌가 싶다. 고대 역사서 한서(漢書)에 나오는 말이다. ‘느슨해진 거문고 줄을 다시 팽팽하게 바꾸어 맨다’는 의미다. 조직이나 제도를 새롭게 정비할 때 주로 쓰는 표현이다. 경영도 결국 타이밍이다. 이들의 이번 인사가 혁신의 마중물이 될 지는 두고 볼 일이다. 해현경장과 실우치구(失牛治廏,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는 한 끗 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