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大企業).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자본금이나 종업원 수 따위의 규모가 큰 기업을 지칭한다. 우리나라는 곧 ‘대기업=재벌’로 읽힌다. 재벌(財閥)은 재계에서 여러 개 기업을 거느리며 막강한 재력과 거대한 자본을 가지고 있는 자본가 또는 기업가의 무리를 뜻한다. 우리나라는 아직 대기업, 재벌이란 단어에 거부감이 존재한다. 사전에 ‘대기업병(大企業病)’이란 단어가 실릴 정도다. 규모가 커지면서 비롯된 집단 구성원들의 무사안일주의, 관료화, 관행, 인사 적체, 의사결정 지연 등을 꼬집는 말이다.
과거 대기업들이 이 같은 이미지로 비춰지다 보니 정부가 이들을 규제하기 위한 제도를 만들었다. 바로 1987년부터 매년 공개하는 ‘공시대상기업집단(대기업 집단)’이다. 대기업에 경제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고 효과적으로 규제하고자 대기업 자산 순위를 대외적으로 발표한다. 자산 5조원이 넘는 대기업들을 대상으로 등수를 매긴다. 기업 입장에선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규제의 칼을 정부가 쥐고 있다 보니 속으로 끙끙 앓을 뿐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최근 발표한 ‘2024년 공시대상기업집단’에서 대기업은 총 88개로 전년보다 6개 늘었다. BTS(방탄소년단), 뉴진스 등 글로벌 아이돌을 키워낸 ‘하이브’가 국내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지정됐다. 여행 및 호텔·리조트 사업을 영위하는 ‘소노인터내셔널’과 ‘파라다이스’, 아웃도어 브랜드 노스페이스를 운영하는 ‘영원’도 대기업 반열에 올랐다. 맡고 있는 분야가 유통·바이오 전반이라 이를 주력으로 하는 대기업 집단이 더 눈에 띈다. 총 88개 대기업에서 유통·바이오와 연관 깊은 기업들은 가장 높은 순위에 있는 롯데(6위)부터 마지막 파라다이스(88위)까지 20여곳이다.
대기업 집단에 이름이 오르게 되면 소속감 면에선 나름 어깨를 으쓱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엄연히 공시대상기업집단 발표의 취지는 규제다. 대기업 등수를 매기는 건 전 세계에서 한국만 유일하다고 한다. 지금의 대기업은 경쟁력과 인프라, 시스템, 사회 기여 등 여러 면에서 과거와 많이 다르고 훨씬 성숙해졌다는 게 사회 전반에 깔린 생각이다. 대기업은 더 이상 국내가 아닌 전 세계를 무대로 사업을 영위하면서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는 수준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그 때나 지금이나 변화 없이 기계적으로만 규제의 잣대를 대고 있다.
우선 ‘자산 5조원’이란 대기업집단 편입 기준은 2009년부터 15년째 바뀐 게 없다. 2009년 당시 대기업집단 수는 48개였다. 그동안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2배 가까이 늘었다. 자산 기준을 시장상황에 맞게 고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나오고 있지만 정부는 여전히 귀 막고 있다. 대기업이 우리 경제에 미치는 집중도 역시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 한국경제인협회에 따르면, 국내 100대 기업 매출 비중은 2011년 58.1%에서 2020년 45.6%로 12.5% 줄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9개 회원국과 비교하면 한국의 100대 기업 매출 비중은 15위로 하위권이었다. 산업 전 분야에 걸쳐 탄탄한 중견·중소기업은 물론 미래를 이끄는 스타트업 비중이 커지면서 대기업이 우리 경제를 온전히 쥐락펴락할 수 있는 건 아니란 의미다.
한경협에 따르면 대기업집단이 적용받는 규제 수는 270개가 넘는다. 기업집단 및 주식소유, 내부거래 등 속살을 다 까야 한다. 외국계 대기업은 이 같은 잣대에 별다른 제한을 받지 않고 있다. 정부의 대기업 등수 매기기는 역차별만 심할 뿐이다. 이렇다보니 ‘만만한 게 대기업’이란 자조 섞인 말이 나온다. 세상이 바뀌고 기업은 글로벌 무대에서 치열하게 경쟁 중이다. 정부의 무딘 시각이 답답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