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근래 여름이 어서 끝나길 간절히 바라는 때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낮밤 가릴 것 없이 ‘덥다’라는 말을 달고 산다. 한 달 넘게 지속된 서울의 열대야는 기록을 갈아 치웠다. 더위가 가시고 선선한 가을을 맞는다는 ‘처서’가 지났지만 무더위는 그칠 줄 모른다. 또 버스,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을 타거나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많은 곳에서는 마스크를 다시금 쓴다. 코로나 재유행 때문이다. 고생한 기억이 있다 보니 답답하고 땀도 나지만 그래도 마스크를 꺼낸다. 무더위에 코로나, 출퇴근하는 입장에선 나름 ‘고난의 행군’이다.
이에 비할 순 없지만 기업들도 체감경기가 좋지 않아 고난의 행군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내수 부진과 미국 대선의 높아진 불확실성, 글로벌 경기침체 우려, 중동전쟁 확전 불안감, 중국 경기회복 지연 등 대내외 악재들이 지속된 탓이다. 실제 한국은행이 최근 발표한 기업경기조사 결과에서 8월 전 산업 기업심리지수(CBSI)는 전월보다 2.6포인트(p) 하락한 92.5로 집계됐다. 제조업, 비제조업 가릴 것 없이 모두 하락세다. 앞서 7월도 마찬가지였다. 2개월 연속 악화다. 기업들도 여름 무더위와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셈이다.
유통업계에서 ‘비상경영’ 카드를 하나둘 꺼낸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업계를 이끄는 롯데와 신세계는 사실상 비상경영에 돌입했다. 롯데그룹은 주력인 유통·화학 부문 부진으로 이달부터 비상경영체제로 전환했다. 그룹 컨트롤타워인 롯데지주는 각 계열사별 비용절감 대책을 세우는 등 대응에 나섰다. 한 때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고 평가 받을 만큼 호시절을 보냈던 롯데면세점은 희망퇴직, 임원 급여 삭감 등 강도 높은 긴축경영을 전개 중이다. ‘만성적자’ 상태의 롯데온도 희망퇴직 신청을 받았다.
신세계그룹도 주력인 이마트를 비롯해 이마트에브리데이, SSG닷컴이 희망퇴직을 단행했다. 그룹 재무관리를 총괄하는 경영총괄 부사장에 JP모건 출신 IB전문가를 영입했다. 이 외에 CJ, KT&G, 이랜드, 동원, 삼양 등 다른 유통 대기업들도 정도의 차는 있을지언정 비슷한 분위기다.
그렇다고 해서 기업들이 줄이고, 깎고, 빼는 것만은 아니다. 내수 침체 한계를 극복하고자 글로벌 시장에 과감히 도전하면서 출구를 찾고 있다. 롯데그룹의 식품 계열사 롯데웰푸드는 세계 1위 인구대국 인도를 비롯한 해외사업에서 공격적으로 영업·마케팅에 나서면서 올 상반기 1000억원을 웃도는 영업이익을 냈다. 전년 동기보다 50%가량 늘어난 수치다. CJ그룹 핵심인 CJ제일제당은 상대적으로 취약한 유럽 식품시장 공략을 위해 현지 법인을 세우고 판로 개척에 적극 나섰다. 덕분에 유럽시장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7% 늘었다. 2분기 전체 영업이익 역시 14% 증가했다. 불닭시리즈로 K라면 대세가 된 삼양식품은 작년에 창사 첫 매출 1조원을 돌파한데 이어 올 상반기에만 8000억원을 넘어서며 가파른 성장세를 보였다.
기업들은 합치고 통합하면서 규모의 경제와 효율성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있다. 동원F&B는 자회사 동원디어푸드를 흡수합병하면서 통합 시너지를 기대케 한다. 롯데웰푸드가 롯데상사 합병을 검토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조그룹은 연매출 1조원 규모의 식자재 전문기업 푸디스트를 인수하면서 원자재·제조·판매·유통을 아우르는 밸류체인을 완성했다. 오리온은 신약 개발사 리가켐바이오를 인수하며 새로운 도약을 위한 채비를 했다.
처서(處暑)는 더위가 ‘머무르다’와 ‘그치다’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아직은 더위가 머무르는 분위기지만 조만간 그치고 날은 선선해질 것이다. 가을은 풍성한 수확의 시기다. 위기를 견디고자 여러모로 애쓴 기업들 역시 ‘결실의 때’가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