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법’상 검토·심의기구에 불과한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수책위)가 심의·의결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기금위)를 제치고 대표소송을 결정하는 것은 ‘잘못된 권한위임’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국민연금의 대표소송 결정은 현행처럼 공단 기금운용본부가 담당하되 예외적인 사안에 대해 별도 판단이 필요하다면 수책위가 아닌 기금위에 맡겨야 한다는 취지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와 한국상장회사협의회(상장협)는 20일 국민연금 대표소송 정책토론회를 열고 대표소송 결정 권한을 수책위에 일임하는 것에 대해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다.
올해부터 예정된 국민연금 대표소송 추진과 관련해 복지부는 대표소송 결정 주체를 자문기구에 불과한 수책위로 이관하는 ‘국민연금기금 수탁자책임 활동 지침’ 개정을 추진 중이다. 현행 지침은 원칙적으로 기금운용본부가 결정하고, 예외적인 경우에 한해 수책위가 판단하도록 이원화됐다.
기금운용본부는 국민연금공단 내 전문적인 기금운용 조직이다. 반면 수책위는 정부가 주관하는 기금운용위원회 산하기구로서 노동·시민사회단체 추천 위원이 다수로 구성된 자문기구에 불과하다.
이동근 경총 상근부회장은 개회사에서 “복지부가 추진하는 지침 개정의 핵심은 국민연금의 대표소송 결정 주체를 공단 내 전문적인 기금운용 조직에서 노동·시민사회단체 추천 위원으로 편중된 위원회로 변경하는 것”이라며 “현행 지침대로 시행도 해보지 않고, 대표소송 결정 주체를 바꿀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세계 주요 연기금 중 정부의 직접적 영향력 하에 있는 연기금은 국민연금이 유일할 뿐만 아니라, ‘노동·시민사회단체에 의한 기업 경영개입’까지 우려된다는 것이다.
수책위에 대표소송 결정 권한을 부여하는 것은 위법 소지가 있다는 입장도 내비쳤다. 이 부회장은 “국민연금 내부 지침에 불과한 ‘수탁자책임 활동 지침’ 개정으로 잘못된 권한위임을 해서는 안된다”며 지침 개정의 철회를 요구했다. 기금운용본부 외에 대표소송을 결정할 수 있는 주체는 기금위 뿐이라는 것이다. ‘국민연금법’에 따르면, 수책위는 기금위의 심의·의결 안건을 사전에 검토·심의하는 기구다.
발제에 나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최준선 명예교수는 “수탁자의 의무는 기업가치 향상을 위한 대화”라며 “국민연금이 의결권 행사를 넘어 주주제안이나 대표소송을 추진하는 것은 건전한 목적의 대화를 넘어선 과도한 경영간섭”이라고 주장했다.
이사를 상대로 대표소송을 제기한 사실이 알려지면, 기업 역시 국제적 망신을 초래하게 되고, 외국 헤지펀드들의 다양한 위협이 가능해진다는 게 최 교수의 진단이다. 최 교수는 “왜곡된 수탁자 책임론에 기초해 끊임없이 경영권 간섭을 시도하며 반기업 정서를 자극하면, 결국 국가경쟁력 상실로 이어진다”며 “국민 노후자금으로 주주노릇하면서 국민의 이름으로 경영간섭을 정당화하는 그것이 곧 ‘연금 사회주의’”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지정토론에서는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권재열 교수를 좌장으로, 상장협 정우용 정책부회장(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 위원), 건국대 경제통상학과 김원식 교수, 선문대 법경찰학과 곽관훈 교수, 경총 이상철 홍보실장(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 위원)이 토론자로 나서 다양한 정책 대안을 제시했다.
정우용 상장협 정책부회장은 ‘권한과 책임의 일치’ 차원에서 수탁자책임 활동은 원칙적으로 기금운용본부에서 담당하되, 예외적인 경우에만 기금위가 결정하는 구조를 만들고 수책위는 법에 따라 기금위의 순수 자문기구로 활용할 것을 제안했다.
정 부회장은 소송실익 검증과 관련해 “실제 소송에서는 ‘손해의 공평 타당한 분담’을 명목으로 법원이 손해액을 직권 감액하기 때문에 적어도 청구 가능한 손해배상액에 국민연금의 지분율을 곱한 금액이 소송관련 비용보다 월등히 커야 소송실익이 있다”고 강조했다.
김원식 건국대 경제통상학과 교수는 “기업의 건전한 경영을 실질적으로 유도하는 데에는 장기간 소요되는 대표소송보다 ‘월스트리트 룰’을 적용해 투자기업 주식을 전량 매각하는 방식이 더 효과적”이라고 제안했다. 대표소송으로는 기업가치를 제고할 수 없고 오히려 호재 없이 경쟁기업의 주가만 높이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곽관훈 선문대 법경찰학과 교수는 “대표소송 결과로 책임을 지는 주체는 결국 기업의 주주와 국민연금 가입자인 국민”이라며 “정부로부터 독립된 전문가들이 국민연금의 기금운용과 주주권 행사를 판단하고 그 결과에 책임지는 거버넌스 정립이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구조적으로 전문성과 독립성 및 책임성이 부족한 수책위가 대표소송을 결정할 경우 기금운용의 수익성 및 안정성에 대한 고려보다는 정치적 판단이나 여론에 의한 결정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에서다.
기금위 위원인 이상철 경총 실장도 수책위에 대표소송 결정 권한을 부여하는 것과 관련해 “수책위에 참여하는 개별 위원들의 전문성은 수탁자책임 활동, 즉 주주활동에 국한되는 위원회 특성상 경제 상황이나 기업 경영, 기금운용 전반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국민연금이 최근 5년간 반대의결권을 행사하고도 실제 부결된 비율이 평균 2.4%에 불과하다는 점도 불안 요소로 지적됐다. 의결권 행사 방향 결정은 수책위 소관이다. 이 실장은 “반대의결권을 행사하고도 부결율이 지극히 낮다는 것은 수책위 판단이 전체 주주가치에 부합하지 못함을 방증하는 것”이라며, “이러한 상황에 대표소송 결정 권한까지 부여하는 것은 과도하다”고 평가했다.
앞서 경총과 상장협 등 7개 경제단체는 국민연금의 대표소송 추진과 관련해 관련 절차 및 결정 주체 등 중요사항을 법률에 명확히 규정하고, 남소방지를 위한 대상사건 제한 및 소송실익 검증장치 마련을 요구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