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계가 기업의 혁신과 성장을 가로막는 지주회사 금산분리 규제의 개선을 촉구하고 나섰다.
대한상공회의소는 18일 ‘지주회사 금산분리 규제개선 건의서’를 통해 “산업과 금융의 경계가 흐려지는 `빅블러' 시대를 맞고 있는 현재 낡고 과도한 금산분리 규제가 지주회사 체제 기업의 첨단전략산업 투자와 신사업 진출기회를 가로막고 있어 개선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공정위에 따르면 현재 공시대상기업집단 81개 중 약 39개가 지주회사 전환집단으로 절반(48.2%)에 가까운 그룹이 소유지배구조로서 지주회사 체제를 채택하고 있다.
지주회사는 최상단 회사가 다수 계열사를 수직적 형태로 보유하는 피라미드형 기업소유구조다. 공정위는 지주회사 체제 내 자산총액 합계가 기업집단 전체 자산총액 합계액의 50% 이상인 집단을 ‘지주회사 전환집단’으로 정의하고 있다.
상의는 “지주회사 체제가 한국의 대표적인 기업소유지배구조로 자리잡았지만 국내 기업들만 글로벌 스탠다드와 거리가 먼 규제를 적용받고 있다”며 “4차산업혁명기 치열한 기술경쟁 및 신산업 선점에 있어 족쇄로 작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지주회사가 금융·보험사 주식을 소유할 수 없도록 하는 금산분리 규제는 1999년 지주회사를 허용하면서 기업 부실위험 전이를 차단하고 경제력 집중을 방지하기 위해 도입했다”며 “그러나 △일률규제 △과잉규제 △비지주회사와 차별 등 3가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우선 금산분리 규제 대상인 금융업의 범위가 지나치게 넓다. 공정거래법은 통계 목적의 한국표준산업분류상 `금융업 및 보험업'을 그대로 금산분리 규제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로 인해 지주회사는 은행, 보험 등 수신기능 금융업뿐만 아니라 규제 필요성이 의문시되는 신탁업, 집합투자업, 여신금융업, 여타 금융서비스업 등 여신기능 금융업도 영위할 수 없다.
이같은 지주회사 금산분리 규제는 글로벌 스탠다드와도 동떨어져 있다. 일본, EU는 관련 규제가 없고 미국은 은행 소유만 금지하고 있는 반면 우리나라는 모든 금융업을 금지하는 광범위한 금산분리 규제를 적용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지주회사 산하에 비은행 금융회사를 소유할 수 있다. 실제 알파벳(구글의 지주회사), 인텔 등은 구글벤처스, 인텔캐피탈 등을 통해 유망산업에 대한 M&A와 투자를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둘째는 과잉규제 문제다. 공정거래법은 지주회사에 대해 부채비율, 출자단계, 최소지분율 등 규제를 통해 지배력 확장을 차단하고 있다. 아울러 금융복합기업집단법은 금융 계열사의 리스크(Risk)가 다른 계열사로 전이되지 않도록 매년 금융복합기업집단 지정 및 사전관리하기 때문에 공정거래법상 금산분리 규제는 중복·과잉규제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비지주회사 체제인 기업집단과의 차별 문제다. 지주회사 체제 그룹은 모든 금융사 소유가 금지되는 반면, 비지주회사 체제 그룹은 은행을 제외한 보험·증권·집합투자업 등을 보유할 수 있다. 올해 금융복합기업집단으로 지정된 7개 그룹의 경우 국내에 117개 금융회사를 보유하고 있다.
상의는 4차산업혁명, 탄소중립 등 산업구조 격변기를 맞아 미래기술·산업 선점 경쟁이 치열해지는 시대변화를 고려해 한국에만 유일한 지주회사 금산분리 규제를 조속히 개선해야 한다고 밝혔다.
최근 전략산업 분야에서 글로벌 선두경쟁을 벌이고 있는 주요국들은 세제혜택 외에 보조금을 통해 기업의 투자자금 조달을 지원하고 있다. 미국은 반도체법(Chips Act)을 통해 반도체 설비투자에 390억달러를,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통해 배터리산업에 60억달러를 지원하고 있다. 일본은 TSMC 제1공장을 유치하면서 4조3000억원을 제공했고 제2공장 설치비용의 3분의 1도 지원할 예정이다. 인도는 반도체 생산기반 구축을 위해 약 25조원의 보조금 지원계획을 발표하고 미국 마이크론, 대만 폭스콘 등 글로벌 기업을 유치 중이다.
주요국들은 보조금 정책을 통해 기업의 투자를 적극 지원해 주고 있는데 반해 우리나라는 기업투자에 대한 보조금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통로도 막혀 있는 실정이다.
대한상의는 △국내 대기업의 절반이 지주회사 체제인 점 △경쟁국과 달리 정부 보조금 지원이 없는 점을 고려해 지주회사 금산분리 규제를 개선해 기업들이 ‘기업주도형 전략펀드’를 조성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 2009년 정부가 지주회사 역차별 해소를 위해 일반지주회사의 금융자회사 보유를 허용하는 내용의 금산분리 완화 법안을 국회에 제출해 정무위원회를 통과했으나, 법사위를 넘지 못해 임기만료 폐기된 바 있다.
건의서는 금산분리 규제 완화를 우려하는 시각을 감안해 은행 등 수신기능 금융업은 금산분리 규제를 유지하되, 대기업의 지배력 확장이나 부실전이 가능성이 없는 집합투자업 등 여신기능 금융업에 대해서는 금산분리 규제를 배제할 것을 주문했다. 지나치게 경직적인 금산분리 규제를 완화해 지주회사도 비지주회사와 동일하게 비은행 금융사 보유를 허용하자는 것이다.
이수원 대한상의 기업정책팀장은 “20여년에 걸친 경제계와 정부의 노력으로 복잡한 순환출자 구조에서 단순투명한 지주회사 체제로 기업소유구조가 정착된 것은 괄목할 만한 성과”며 “그러나 지주회사만 비은행 금융사 보유를 금지하는 것은 한국에만 있는 과잉규제로 국내기업에 불리한 족쇄인 만큼 조속히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