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80에 팔로우만 5000명, SNS통해 사람들과 소통
봉사하는 삶-충효예-이익추구의 한계를 인생관 삼아
김철운 총재, 그는 작년에 산수(傘壽/80세)를 맞았다. 그런데도 놀랄 만한 일이 있다. 기자가 과문해서인지, 사회 저명인사 중에 페이스북·트위터·카톡 등을 하는 사람으로는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 등 몇 분 안 되는 것으로 안다.
한데 김총재는 틈만 나면 이런 SNS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한다. 그를 따르는 팔로우만 5000여명이 넘는다. 그러고 보니 그의 창의력과 선견지명은 나이와 상관없이 샘솟는 듯하다.
우리 국민 대다수가 컴퓨터에 대해 제대로 인식조차 못하고 있던 1980년대 중반, 그는 한국물가협회 회장으로 재직하면서 삼성전자에서 NEC컴퓨터를 구입했고, 1986년에는 물가DB를 구축했다. 또 우리나라 물가조사기관으로는 사상 처음으로 한국통신과 데이콤 통신망에 유료로 가격정보를 공급하기도 했다.
아무튼 김총재는 가만 앉아있지 못하는 성격이다. 매일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창안해내고 만들어 나가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다.
▲힘드시지 않으세요? 이제 연세도 있으시고, 그만 좀 편하게 쉬고 싶다는 생각도 드실만한데….
-무엇이든 가만 두면 녹이 쓰는 법이지요. 사람도 끊임없이 움직이고 머리를 써야 해요. 나이와 상관없이 꾸준한 성찰을 통해 자기개발을 해나가야 하죠. 힘들다는 생각은 평생 해본 적이 없어요. 새로운 일을 하면 재미가 있지요. 난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모두 겪으며 살아온 세대입니다. 그런 험악한 세월을 견뎌오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내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심 같은 것들이 체화됐다고 생각해요.
김총재의 삶은 사실 매우 고단했다. 우리나라 경영학계의 거두인 송기철 박사는 김총재를 자수성가형 CEO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만큼 힘들게 살아왔다. 그는 1934년 충청도 청양군 출신이다. 정산면 백곡리라는 곳에서 태어났는데, 외할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시다 50대초에 김총재가 2세 때 돌아가셨다. 그는 한문서당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이때 익힌 충효예정신이 그의 삶의 주춧돌이 됐다.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보통학교(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나의 이름은 김철운이 아니고 가네기 데스웅이라는 일본이름으로 개명되었어요. 그렇지 않으면 공부를 할 수 없었죠. 일어로 공부하고 신사참배를 강요당했고, 툭하면 광솔 따기와 콩밭 만들기에 동원됐죠. 3학년이 되니 학생들의 키만 한 목총으로 제식훈련을 시키기도 했어요. 이때 제 숙부님도 징병으로 끌려가 집안이 난리가 났던 기억이 새롭네요.”
저수지에 돌달고 자살결심…임어당 책 읽고 마음 바꿔
▲‘초근목피’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먹고 살기 힘드셨겠습니다.
-말로 다 할 수 없었지요. 콩깻묵과 피죽으로 연명하게 하면서, 쌀과 보리, 콩 등을 강제로 공출하여 군량미로 충당하는가 하면, 무기를 만든다고 쇠붙이란 쇠붙이는 몽땅 가져갔는데 더 많이 가져오지 않는다고 주리를 틀고, 가마니 뒷대를 다리 사이에 넣는 식의 고문을 하는 등 악독한 짓을 서슴지 않았어요.
▲항일정신이 저절로 싹텄을 만도 합니다
-아니요. 초등학교 4학년이 무얼 알겠어요?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광솔을 따고 쇠붙이를 주워 모았는데, 제일 많이 주우면 연필 한 자루를 상으로 준다길래 정신없이 날뛰었어요. 어리석은 시절이었죠. 나라를 빼앗기고 당하는 압박과 수모인 줄도 몰랐으니, 그게 바로 민족의 비극이었습니다.
▲해방을 맞이하셨을 때 심정은 어떠셨는지요?
-나는 학교에서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서야 해방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사람들을 따라다니며 만세를 부르기도 했지만, 아직 어려서 그랬는지 뭐 큰 감흥은 없었어요. 오히려 얼마 지나 우리말을 배우는 것이 힘들어 투덜거리기도 했지요. 단시일 내에 급속하게 한글과 맞춤법을 배운 탓에 지금도 글을 쓰면 맞춤법이 틀려 오자가 많아요.
▲어린시절 누구나 자신만의 꿈을 가지잖아요?
-물론이죠.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워 갈 수가 없었고, 인문계 중학교를 가고자 해도 대학에 갈 형편도 아니어서, 실업계인 대전 한밭중학교 기계과에 원서를 내고 시험을 치려고 혼자 갔었죠. 그런데 비를 맞게 되어 병이 나는 바람에 시험을 마치지 못했어요. 엎친데 덮친격으로, 그때 하필 아버님께서 늑막염으로 병원에 입원까지 하시게 돼 진학을 포기해야만 했지요.
이후 김총재는 농사를 지으며 소와 돼지 등을 기르다가, 정산에 있는 농업보습학교에 들어간다. 그 와중에 꿈에도 생각을 못하였던 6.25전쟁이 일어났다. 그는 가족과 함께 칠갑산 아래 천장리 말티골 동네로 피난을 가서 지내다 귀가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내무서원에게 붙잡혀 죽을 고비를 넘기는 일을 당하는 등 온갖 고생을 다했다. 지루한 전쟁이 끝나고 난 후에는 가축 판돈과 농사지은 쌀을 주고 물레방앗간을 사서 운영하였다. 그러다 정산중학교로 편입학을 해 축구선수로 활약하기도 한다.
이후 그는 아버지께서 민주당 운동을 하시다 투옥된데 분개하여 고등학교졸업반(공주 영명고교) 때부터 반독재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대학에 들어가서부터는 더욱 적극적으로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나중엔 민한당 후보(청양, 홍성, 예산)로 국회의 문을 두드려 보기도 했다.
▲당시 부정선거도 비일비재했다죠?
-아휴, 말도 마세요. 서울에서 깡패가 내려와서 협박을 한다든지, 돈으로 매수하는 일은 다반사였죠. 대리투표, 릴레이 투표 등으로 국회에 진출하기도 했습니다. 저를 돈으로 매수하려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어요.
▲그래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돈의 유혹을 쉽게 뿌리치기 힘드셨을텐데요?
-하하하…. 쉽지는 않았지만 뿌리쳤지요. 그 덕에 이렇게 돈 없이 살고 있잖습니까? 그때 돈을 좇았으면, 지금쯤 나락으로 굴러 떨어져 있겠지요.
▲그래도 이리저리 들어오는 돈이 있었을 법도 한데요….
-물론 정당한 돈이라면 받고 쓰고 했겠죠. 하지만 뭔가 구린데가 있거나 정의와 어긋난다 싶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받았어요.
실제 그는 한국물가협회를 만들어 활동할 당시, 고 정주영 현대건설회장이 거액(당시 6억, 현재가치로 100억)을 희사하겠다고 했으나 받지 않은 일은 재계에서도 유명한 일화다. 또한 정부 돈을 절대로 안 받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고교시절에 인생관을 정립하셨다면서요?
-감수성이 예민할 때여서 그랬는지 철학에 관심이 있었어요. 철학책이라면 무엇이든지 읽어봐야 했죠. 한때는 염세적으로 변해 “지금 나의 처지에는 더 살면 더 큰 죄인이 될 것이고 지금 죽으면 죄짓는 일이 적을 테니 지금 죽는 것이 좋다”는 생각으로 죽기를 결심하고, 집 옆에 있는 저수지에서 목에다 돌을 매달고 자살할 계획을 세웠었죠.
▲그런데 아주 건강하게 오래 사시고 계십니다.
-그게 말이죠, 사람 목숨은 모르는 겁니다. 용선이라는 친구에게 빌린 임어당 철학독본이라는 책을 자살을 하기 전날 밤을 꼬박 새워 읽었어요. 그러고 나니, 나의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거리에서 쓰러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보자는 강한 결의가 용솟음쳤습니다.
▲좀 머쓱해지셨겠습니다. 인생관을 그때 정립하신 건가요?
-그렇죠. 어제까지 물에 빠져 죽기로 했던 결심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를 생각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었어요. 그때 인생관을 확실히 새긴 후,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습니다.
▲흥미진진합니다. 죽음을 넘어선 인생관이라…. 괜히 엄숙해지는데요. 뭡니까?
첫째는 봉사하는 삶이고, 둘째는 충효예, 셋째는 이익추구의 한계인데 이것은 남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김총재는 두 번째 인생관인 충효예를 실천하는 방법은 교육자의 길이라고 생각하여 공주사대 국문학과에 입학원서를 냈었지만, 고교에서 과를 잘못 기재하는 실수를 하는 바람에 그만 낙방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는 서울행을 결심하게 되고, 세종대 회계학과에 들어간다.
무작정 상경 회계공부…뇌출혈로 죽을 고비 맞기도
▲진로가 쉽게 바꿔지던가요?
-무작정 상경했어요. 가정 형편상 서울에 갈 엄두를 못 냈으나, 회계학을 공부했으니 전공을 살려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난한 것도 상당히 두려웠거든요. 돈을 번 다음 충효예를 실천해 나가기로 마음먹었죠. 부모님이 어렵게 마련하여 주신 등록금과 여비를 가지고 상경하여 등록금을 납부하자, 단돈 5원이 남았어요. 친구 자취집을 전전하며 어려운 생활을 이어나갔죠.
김총재는 남덕우 전 국무총리 밑에서 회계사 공부를 하면서 가정교사 등 각종 알바를 하며 버텨나갔다. 대학 졸업 후에는 동국대학 행정대학원과 서울대학교 최고 경영자과정을 수료하였으며, 크리스천 대학에서 명예철학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이 기간 동안 정당활동에 뛰어들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송기철, 윤병욱박사 같은 사람이 주축이 된 고대연구소에 다니다가 한국물가협회를 창립한다.
김총재는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다. 원가조사용역을 수주하여 여관에 들어가 특근 작업을 하다가 뇌출혈이 일어나 입원하는가 하면, 뇌신경이 끊어지고 실명직전에 갔던 일을 비롯하여, 최근에는 자동차 사고로 몸에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대동공업 농기계 부정사건에 억울하게 걸려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았고, 노조의 투서로 경찰에 들락날락 거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저절로 뇌신경이 이어지는 등 병이 나았고, 그의 말처럼 하나님의 도움으로 어려운 고비도 무수히 넘겼다. 특히 꼭 필요한 900만원(1975년)이 없어 애를 먹고 있을 때 남산타워 원가계산 수주와 포항제철에서의 예산편성 수주로 위기를 넘겼던 일과, 최근 부산지사에서의 문제로 큰돈이 필요하자 때맞춰서 메꿔지는 기적 등 이상한 일을 몇 번이나 경험했다고 한다. 그는 이 모두가 기도의 힘 덕택이라고 믿고 있다.
▲이제 세월을 좀 건너 뛰어보겠습니다. 물가협회를 만들어 고생도 많이 하셨죠?
-원용석 전 장관님을 회장으로 모시고 1973년 3월21일 창립했으니, 벌써 창립 40년이 넘었군요. 그간 원가조사 및 물가조사 윤리강령을 제정하고 물가조사요령과 원가조사기준을 정하여 공신력을 제고해 우리 경제 발전에 상당한 도움을 줬지요.
그동안 물가자료. 상품정보, 적산정보 같은 것을 발행하고 시장조사를 통해 현장물가를 정확하게 파악하는데 상당한 노하우를 축적했습니다. 그러나 노조의 무리한 요구와 인신공격 등으로 상처를 많이 입었습니다. 이제는 노조도 바뀌어야 합니다. 노사가 공생하는 관계를 만들어나가기 위해서는 무리한 요구를 자제하고 한 배를 탔다는 심정으로 협조해 나가야 합니다. 자기 직장을 자기가 지키지 않으면 누구도 지켜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자기 위치를 스스로 찾아가야 할 것입니다.
▲데이터베이스산업협회 대표도 맡으셨죠? 그래서 젊은이들 못지않게 인터넷이나 모바일에 능하신 겁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죠. 물가협회가 1986년부터 DB를 구축하고 통신망을 통하여 정보를 공급하는 선구자적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 젊은이들이 찾아와서 데이터베이스산업협회를 설립하자고 해요. 그래서 DB생산업체를 보호하고 장차 우리나라가 선도적으로 이끌어 나가기 위해 꼭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만든 것입니다. 정보화 사회는 공유하는 사회를 말하는 것이며, 곧 신용사회를 의미하는 것이죠. 이와 같은 사회에서는 정보의 독점이란 있을 수가 없게 되며, 신용이 경쟁의 바로미터가 되죠.
모든것의 근본은 忠孝禮倫道의 법칙이 세계평화
▲십수년 전 부터는 충효에 실천운동 본부와 세계평화실천운동본부 일로 바쁘십니다. 남북문제에도 관심이 많으시지요?
-1996년 3월 23일에 윤택중 전 문교부장관을 총재로 모시고 충효예실천범국민운동본부로 출범했어요. 그런데 1년 만에 윤총재님이 건강이 나빠져 사임하시는 바람에 바통을 이어받았죠. 모든 것의 근본은 충효예입니다. 천도(天道)는 충도(忠道)요, 충도는 덕도(德道)요, 덕도는 효도(孝道)이며, 효도는 인도(人道)요, 인도는 예도(禮道)요, 예도는 천도로 충효예 윤도(倫道)의 법칙이죠. 이것은 바로 세계평화와 이어집니다. 바로 세계평화실천운동본부에서 하는 일이죠. 10년 전 북한을 방문하여 북측 충효예실천운동본부 설립, 남북효도관광사업, 남북노인돕기사업 등을 제의한 적이 있죠. 그러나 북측의 무성의로 진전이 없습니다.
▲세계평화는, 그러고 보니 북측이 큰 걸림돌이군요.
-그렇습니다. 세계가 바뀌어 가고 있는데 북쪽만 엄동설한 그대로입니다. 지도부의 생각이 고쳐져야 합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 호혜의 정신, 인류에 대한 궁휼함 같은 것들로 채워져야 합니다. 권력을 앞세워 국민들을 통치의 도구로 삼는다면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세계평화실천운동본부는 바로 이런 정신들을 지구상에 뿌리내리고자 하는 운동에 다름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인생을 사는데 도움이 될 만한 말씀 한 마디만 해주십시오.
-공수래(空手來) 공수거(空手去)라, 사람은 누구나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갑니다. 그런데 무엇을 가지고 가겠다고 아귀다툼을 하면서 사는 건지 알 수가 없어요. 모두가 하나님의 재산이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요, 주신대로 아름답게 다 쓰면 더욱 큰 것으로 채워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김총재는 요즘도 다양한 아이디어를 창출해 내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만난다. 자신의 팔로우들에게 쉴 새 없이 문자를 보내고 카톡을 하는가 하면, 페이스북에 각종 사연을 올린다. 최근 당한 교통사고로 몸이 좀 좋지 않으나, 그의 말투는 여전히 카랑카랑하고 힘이 넘쳤다. 몇 시간 동안 웅변을 하듯 열변을 토해내는 그의 넘치는 에너지는 젊은 청년 못지 않았다. 그를 만나는 동안 그의 에너지가 기자에게로 전이된 듯 활기 충천한 상태로 인터뷰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