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 있어서 통영은 ‘부드럽고 달콤한 바다 냄새’다. 그 냄새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온다. 이화백 집안의 품성은 대체로 온화하다. 할아버지는 이 지역 현감을 지내셨는데, 한문학의 대가였다. 그러다 보니 ‘인의예지’의 공맹사상에 영향을 받아 온후하고 성실한 가문으로 소문이 났다. 아버지는 ‘일본 면장’은 안한다면서 ‘굴러온 밥그릇’을 걷어찰 만큼 반골 기질이 있었다 하나, 자식과 이웃사랑은 부드럽기가 비단결 같았다.
어머니 역시 전형적인 조선여성이었으며, 할머니의 손자 사랑은 아흔을 바라보는 노화백의 가슴속에 아직도 절절한 그리움으로 아로새겨져있다.
“어느 여름날이었어요. 할머니 손을 잡고 절에 갔었는데, 스님의 목탁 소리가 아련히 들려오는 가운데 꾸벅 졸다가 가물가물 깨어나기를 반복하던 기억이 지금도 도원경처럼 느껴져요. 포도를 따먹으면서 걷던 그 황톳길이 매미소리와 함께 생생하게 떠오르기도 하고요.”
그의 아버지는 주판이라도 잘 놓으면 면서기라도 하고 호구지책으로 삼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여, 소년 이한우를 상업고등학교에 보냈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아야 비로소 ‘자신의 삶’이 된다. 주판알을 튕기는 이한우보다는 붓을 든 이한우가 더 어울렸다.
이한우에게는 전설적인 일화가 있다. 그는 6.25전쟁 후 부산에 내려온 예술가들의 그림을 보고서 ‘별 것 아니라’는 생각에 자신감을 얻었다고 한다. 또한 모두들 그의 그림을 보고서 대가의 미래를 일찌감치 예견했다고 한다. 이때 이미 그의 마음속에는 면서기나 학교선생(그는 초등학교 선생을 하다가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보다 ‘환쟁이’로서의 삶이 깊이 인각됐는지도 모른다.
그는 소위 엘리트군(群)에 속해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국전을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자 사람들은 그를 다시 보게 됐다. 늦게나마 대학(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미술교육)에서 미술을 전공했으나 거기에서 배울 것이 없었기에, 돈과 시간만 낭비했다고 회상한다. 그는 괜한 멋을 부리는 법이 없다. 학력과 돈을 앞세우며 거만하게 구는 태도도 참지 못한다.
이화백은 그림이란 작가의 인식 한계를 벗어나도록 만들어 준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지각 능력은 오히려 동물의 그것보다 더 제한적이라서 자기 둘레의 현상들만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림을 통해 우리는 상상의 이미지를 만들고 세상을 멀리, 그리고 깊이 살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 그림이 보다 넓은 세계로 줄달음질쳐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 그림을 통한 세계화다. 우리의 눈으로 본 것, 우리의 혼을 담은 것이 세계적으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지난 2005년 7월 프랑스 파리 룩상부르그 공원 오랑주리 전시관에서 초청전을 가졌을 때, 상원의장 크리스티앙 뽕스레(Christian PONCELET)로부터 “유럽과 한국의 전통회화를 동시에 조화롭게 결합시키는데 완벽하게 성공한 작가”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1980년대 이후 담대하면서도 선 굵은 획으로 향토적인 우리의 미를 소박하고 푸근하게 그려낸 ‘아름다운 우리강산’ 시리즈는 바로 이런 면에서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는 2000년대 중반까지 파리에서 몇 년 지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이, 서양 미술의 중심지 파리에서 살아남으려면 아류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세계에서 몰려든 화가들이 저마다의 개성을 앞세워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돋보이려면 깊은 내공에서 우러나오는 독창적인 화풍이 필요했다. 이런 면에서 서양 미술에서 잘 만날 수 없는 토속적인 동양풍의 양식을 지닌 이화백의 작품이 ‘먹혀들었다’
그가 가벼운 하품을 했다. 잠시 분위기 전환을 위해 첫사랑에 대해 물었다. 사람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첫사랑에 대해서는 그저 마음이 설레는 모양이다. 빙그레 웃으며 노화백은 마치 생전 처음 누군가에게 그 이야기를 하듯 입을 열었다.
“스물두살 때인데…. 같은 학교에 근무하던 여선생이 너무 맑고 아름다웠어. 가슴이 두근거렸지. 그런데 몇 번 만나다 내가 군대에 가는 바람에 헤어졌어. 하하하….” 그러더니 누가 듣기라도 할까 싶은 듯, “그 이후로는 여자에 대해 관심이 없었어”라고 못을 박았다.
내친 김에 장난기가 발동해서, 만일 연필과 실, 그리고 그림이 있는 돌상을 받는다면 무엇을 제일 먼저 선택하겠느냐고 물었다.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파안대소했다. 어린아이처럼 웃는 그의 해맑은 얼굴이 그가 그린 그림 속 아이들 모습과 오버랩됐다.
그는 수석과 분재에도 취미가 있어 꽤 많은 양을 수집해놓았다. 그림이외에 이런 것들에도 재미를 붙여야 삶이 지루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함께 정원과 텃밭, 그리고 분재와 수석이 있는 비닐하우스를 거니는 동안 그는 시종 힘차고 즐겁게 나무와 돌들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자식과 손자 자랑도 빼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그림 그리기에는 한이 없다고 했다. 또 자신이 택한 길이 참으로 고마운 길이었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의 삶인들 늘 평탄했기만 했겠는가? 뉴욕에서 전시회를 열어 준다는 교포에게 사기를 당하기도 했고, 프랑스 노르망디 수도원에 여행을 갔다가 부인이 가재를 잘못 먹고 죽을 뻔하기도 했으며, 그밖에 크고 작은 아픔들도 있었다. 여하튼 그는 화려한 인생보다는 자기가 만족하면서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인생이라고 충고한다.
이제 이화백은 자신이 이제껏 그려놓은 그림들이 세계인의 가슴속에 한국적 정서로 살아 꿈틀거리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의 색이 오방색이 아니라 자신만이 뿜어내는 고유한 색의 하나로 인정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와 헤어져서 걸어 나오는 천안시 안서동 산길은 연녹의 잎새가 하늬바람에 하늘거리는 전형적인 5월이었다. 그 바람결을 따라 고개를 들자, 바로 이한우 화백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우리 색이 그곳에 있었다.
■ 이한우 화백은…
경남 통영에서 태어난 이 화백은 올해 87세다.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은 “황토 빛이 주조를 이루는 이 화백의 그림은 잠들었던 한국인의 문화적 유전자를 흔들어 깨운다”고 평했으며, 프랑스 평론가 파트리스 드 라 페리에르씨는 “동양의 아름다운 시를 염색해 놓은 것 같고 인상파의 대가, 반 고흐의 영감을 거울처럼 반영하고 있다”고 극찬했다.
1976년 국전 제27회 문화공보부장관상 수상과 1978년 국전 추천 및 초대작가를 역임했으며, 보관문화훈장과 문화은관훈장을 받았다.
2000년 프랑스 미로미술관에서 전시했으며, 샹젤리제 거리의 100평짜리 MB갤러리에서 초대전을 가졌다. 또 2006년 프랑스 문예기사훈장과 2007년 프랑스 ‘앙드레 말로’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이제 그의 말은 어눌해졌으며 힘도 예전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의 순후무비(淳厚無比)한 눈빛은 그의 그림처럼 사람들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