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년 10월 초.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해풍이 하늘의 구름을 멀리 걷어가고 있는 전형적인 가을날이었다. 부산항 부두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힘겹게 달려온 여객선이 닻을 내렸다.
여객선에서 한 쌍의 아름다운 젊은 외국인이 내렸다. 바로 먼 훗날 3·1 운동 '민족대표 34인' 으로 불리는 스코필드 박사와 그의 아내였다.
아름다운 아내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이국적인 항구를 바라봤다.
후일 돌이켜 보면 이 날은,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럭키 데이'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정운찬 전 국무총리(이하 정총리)도 이날 한국 땅에 발을 디딘 스코필드 박사와의 만남이 일생을 바꾸는 계기가 될 줄은 몰랐을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정총리는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스코필드 박사의 토양을 먹으며 자란 서울대 총장이요 대한민국 총리다.
정총리는 스코필드박사를 이렇게 소개한다.
"1916년 세브란스 의학교수로 처음 이 땅에 발을 디딘 박사님은 일생 동안 우리나라의 독립과 발전에 헌신했습니다. 민족대표 33인에게 당시의 국제정세를 알려주고 틈만 나면 카메라를 들고 거리에 나가 일본의 만행을 기록하여 전 세계에 알림으로써 독립의 견인차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석호필(石虎弼)이라는 한국 이름까지 지었죠. 그의 한국에 대한 애정은 지극했고 죽음을 맞을 때까지 한결 같았습니다"
그와 스코필드 박사의 첫 조우는 1960년 4월이다.
정총리가 13세였고 스코필드 박사가 71세, 우리나라 나이로는 72세 때였다. 당시 정총리는 경기 중학교에 다니던 중이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천재가 다닌다는 그런 학교 학생이지만 학비는 물론 하루 밥 한 끼 얻어먹기도 힘이 들어 허리 펴고 웃을 날이 크게 없었다.
이런 사정을 안 초등학교 때 친구 아버지가 스코필드 박사에게 딱한 사연을 전했다. 이야기를 들은 박사는 두 말 없이 등록금은 물론 생활비까지 일체 지원해줬다.
이 만남은 정총리에게 인생을 보는 눈을 가지게 됐을 뿐 아니라 그의 삶을 바꾸는 계기를 마련해 줬다.
정총리는 이렇게 말한다.
"스코필드 박사는 저에게 아버지나 다름없었어요. 저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기댈 언덕이 없었던 차에 사슴처럼 선한 얼굴을 하신 박사님이 나타나신거죠. 저는 그분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저는 우리 집에서 멀지 않는 곳에 사시던 그 분 집을 내 집처럼 드나들었어요. 손자뻘인 나에게 늘 존칭을 쓰시면서 존중해 주셨죠"
당시 스코필드 박사는 서울대학교 수욋과 대학에 재직 중이었다. 외인숙사 2층 한 구석에 자리잡은 약 네 평 넓이의 협소한 방에서 기거했는데 테이블과 의자, 수수한 침대 하나가 전부였다.
박사는 서울대학교에서 제대로 된 숙소를 제공하지 못해 미안해하자 "조그마한 방만 하나 있으면 충분합니다"라며 손사레를 쳤다.
그는 국내철도 2등 무임승차 우대권을 가지고 있음에도 3등 객차를 타고 다니거나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제공할 만큼 철저하게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
이 점은 성철 스님이나 법정 스님같은 절대적 공(空)의 성찰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스코필드 박사는 운명할 때 책 한 권, 구두 한 켤레까지 어려운 사람에게 나눠 주었고 재산을 모두 보육원과 YMCA에 헌납했다.
스코필드 박사의 한국 사랑은 한국 사람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다. 한 번은 그가 영국 런던의 어느 여관이 들었을 때의 일이다.
<그가 여관방에 들어서니 마침 테이블 곁에 대(竹)로 만든 휴지통이 놓여 있었다. 그는 그러한 모양이 죽제 휴지통을 한국에서만 여러번 본 적이 있는지라 그 휴지통을 보자 한국에 대한 그리운 정이 새삼스럽게 솟아오름을 금할 수 없었다. 저것은 한국 땅에서 자란 대를 가지고 한국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겠거니 하니, 그는 휴지통이나마 한 번 만져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 휴지통을 손에 들어올렸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휴지통 겉에는 일본 제품이라고 표시되어 있지 않은가. 그것을 본 박사는 일본에서 억눌려 기를 못 펴고 살고 있을 한국사람들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나 서민적인 것을 좋아했던 박사는 그러한 처지의 한국사람들이 어떻게나 가엾게 여겨지는지 절로 눈물이 나더라고 했다.>
■ 스코필드 박사 略史
1889년 3월 15일 영국 워릭셔주의 럭비에서 태어났다. 1905년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으나 집안이 여의치 않아 진학을 하지 못했다. 1907년에는 캐나다로 이민하였고, 토론토 대학교 온타리오 수의과 대학에 입학한다. 1910년는 소아마비를 앓아 지팡이를 짚게 되었다. 1911년에는 토론토 대학교에서 수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13년 9월에 앨리스 스코필드와 결혼한다.
1916년 봄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장이었던 에비슨으로 부터 권유 서신을 받고 모두에서 언급한 바대로 한국 땅을 밟는다. 이후 세브란스 의전에서 세균학과 위생학을 강의했다.
그는 한국의 여러 지명인사와 교제를 넓혔다. 그중에서 특히 기독교적인 사회운동을 YMCA 총무직으로 실천하던 이상재 선생, 김정혜 여사를 존경하였고, 뒷날 김정혜 여사를 수양 어머니로 섬겼다.
1920년 3·1운동 견문록 '끌 수 없는 불꽃(Unquenchable Fire)'을 탈고 했으며 그해 4월, 강도를 가장한 스코필드 암살미수 사건이 그의 숙소에서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학교와의 근무 계약을 마치고 캐나다로 돌아갔다가 1926년 일시 방한했다.
1958년 대한민국 정부가 광복 13주 기념일 및 정부수립 10주년 경축 식전에 국빈으로 초빙하였으며 서울대학교 수의과 대학에서 수의병리학 강의를 맡았다.
이후 남북미와 유럽에 있던 친구들이 스코필드 기금을 설치하여 그를 도왔다. 이후로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글을 쓰거나 교육 장려 활동을 하며 지냈다.
1970년 4월 12일 국립 중앙의료원에서 별세하였으며, 한국의 독립운동에 기여한 업적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